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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45세

규정공1세  

 

 

현

규정공

-> 추원제 10월1일(음) :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단교리 (두응촌), 교외선 원당역 앞 (오전9:00전까지), 지하철3호선 원당역하차, 뒤쪽출구, 마을버스8번종점하차
-> 규정공대종회 사무실 : 서울 만리동(02-392-5055)

규정공(糾正公) 박 현 : 고려의 문신으로, 密城君(밀성군) 惟孝(유효)의 손자이며, 密城君(밀성군) 興의 아들
司憲府 糾正(사헌부 규정)과 太師(태사)를 지냈으며, 道學(도학).文章(문장).節義(절의)로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糾正公派(규정공파)의 派祖(파조)로 시호는 武烈(무열)이며, 沃川(옥천)의 遠德祠(원덕사)에 祭享(제향)되었다.

 

   

 

 

 

 

46세

규정공2세  

 

 

문유

좌랑공

박문유(朴文有)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 전리좌랑(典理佐郞)을 거쳐 경주판관(慶州判官)을 지냈다.

 

   

 

 

 

 

 

 

47세

규정공3세  

사경

상잔군

 

사인

간의공

 

사민

군수공

박사경(朴思敬)
고려 때 전법판서(典法判書) 겸 상장군(上將軍)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推城翊威功臣)에 책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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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세

규정공4세  

침

전서공

박침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 전의판사(典儀判事)를 지냈으며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세상을 개탄하며 우국의 세월을 보냈다. 뒤에 호조 판서(戶曺判書)에 추증되었다.

 

   

 

 

 

 

49세

규정공5세  

지생

간성부사

 

강생

부제학공

박강생(朴剛生) : 자는 유지(柔之), 호는 나산경수(羅山耕 ), 판사(判事) 침의 아들
고려 공양왕(恭讓王)때 문과(文科)에 급제,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이르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408년(태종 8)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1417년(태종17) 수원부사(水原府事)로 재직 중, 서울로 교체되어 가는 과천 현감(果川縣監) 윤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에서 금천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이 과음(過飮)으로 죽음으로써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 뒤에 등용되어 세종 때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지냈다. 죽은 후인 1424년(세종 6) 딸이 후궁(後宮: 장의궁주)이 되어 1품(品)직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장(文章)이 아름다워 문명(文名)을 떨쳤다.

 

   

 

 

 

 

 

 

 

 

50세

규정공6세  

희맹



 

 

의문

호군공

 

절문

정자공

 

심문

충정공

박심문(朴審問) :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淸齋), 시호는 충정(忠貞), 강생의 아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 署直長)이 되고, 1436년(세종18)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기주관(記注官)으로 있다가 함길도절도사(咸吉道節度使) 김종서(金宗瑞)가 6진(鎭)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야인(野人)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을 건의했다. 1447년 평안도판관(平安道判官), 1448년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종사관(從事官) 등을 역임,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가 살해되자 불만을 품고 집에 있으면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과 왕래하며 단종의 복위를 모의했다.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했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고, 숙모전(肅慕殿)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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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세

규정공7세  

윤공




 

 

종손




 

 

대손

절도사공

 

중손

공효공

박중손(朴仲孫) : 자는 경윤(慶胤), 호는 묵재(默齋). 백당(栢堂), 시호(諡號)는 공효(恭孝), 찬성사(贊成事) 강생(剛生)의 손자
1435년(세종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가 되고, 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세종 말에 사인(舍人)·집의(執義)·지병조사(知兵曹事)·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이 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대사헌·공조·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올랐고, 밀산군(密山君)에 개봉(開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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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세

규정공8세  

인장


 

 

 

 

 

 

남

부평공

 

미楣

존성재

박미(朴楣) : 자(字)는 자첨(子詹), 호(號)는 존성재(存誠齋)
1458(세조4)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이르렀으며 그의 시문(詩文)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학 여지승람(輿地勝籃)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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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53세

규정공9세  

 

의영

대속공

 

광영

밀성군

 

증영增榮눌재공

 

소영

해박공

 

안영

제지공

 

수영



 

박증영(朴增榮) : 1466(세조12)∼1494(성종25), 자는 희인(希仁), 호는 눌재(訥齋), 예조 참의(禮曹參議) 미(楣)의 아들
1480년(성종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8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저작(著作)을 지내고, 14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역임한 후 1490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이듬해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이 되었다. 이해 수헌납(守獻納)을 거쳐 뒤에 교리(校理)로 죽었다. 청주(淸州)의 국계사(菊溪祠)에 제향(祭享)되었다.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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